수요성서연구 게시판 - <시편산책> 시편 1편

<시편산책> 시편 1편

2013.05.01 17:28

만천댁 조회 수:1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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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시편 1:1-6 
말씀 선포자 유대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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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산책 (시 1편)

'모든 인생은 행복이라는 이름의 불행의 전차를 타고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행복을 원하지만, 사실 그가 타고 있는 전차는 불행이라는 전차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행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시편 1편은 여기에 대한 큰 정의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 의인과 악인, 선인과 죄인,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과 인정하지 않는 사람... 이렇게 인생에는 큰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인생의 길을 선택했습니까? 시편은 우리들에게 이 두 큰길을 제시하면서 진정 행복한 자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거기에 대해 소극적인 정의부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두 번째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세 번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점진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 첫째 우리가 쉽게 빠지는 것은 유혹입니다. 유혹은 달콤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쉽게 ?빠지게 됩니다. 악인의 꾀에 빠지면 무슨 길에 서게 되겠습니까? 죄인의 길에 서게 됩니다. 죄인의 길에 서게 되면 어떤 자의 자리에 앉게 됩니까?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부터 끊어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부터 꽉 막아야 합니다. 죄인의 길에 서면 돌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으면 돌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죄인의 길에 서거나 오만한 자리에서 돌아서는 것보다는 훨씬 쉽습니다. 그렇다면 유혹은 어떤 사람들이 물리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

그러면 좀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둘째 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을 지식으로 배우는 사람,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은 조금밖에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말씀은 연구하고, 공부하고, 요목조목 따지는 게 아니라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아멘' '아멘' 하고 먹어야 합니다. 받아들이고, 씹고, 먹고 소화를 시켜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밤 여기 오시기를 참 잘하셨습니다. 여기 오시지 않았으면 악인의 꾀에 빠질 위험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저녁, 이 자리에 오지 않았으면 우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TV 앞에 있거나, 연말이니 어떤 망년회의 자리에 있지 않았겠습니까?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하나님께 시간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나에게 맡겨진 일을 하는 것 외에는 하나님께 내 자신을 온전히 드리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거룩한 교제를 나누는 시간만큼은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죄를 짓지 않는 비결은 내 시간을 예수님께 다 드리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너무나 교활합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면 그 자유를 선하게 쓰지 않습니다. 따라서 될 수 있으면 스스로 자기를 제한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자신에게 족쇄를 채우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예수 외에는 살 수 없게 자신을 제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시간을 점령하면 마귀가 나의 시간을 빼앗아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돈을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와서 다 써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돈은 써야 하는데, 예수님을 위해 쓰지 않으면 마귀를 위해 쓰게 되고, 세상을 위해 쓰게 되고, 자기 쾌락을 위해 쓰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오늘본문말씀시편 1편을 보면 악인의 인생과 선인의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선인의 인생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가뭄이 이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경기가 별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의 좌절과 실패가 이 사람에게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절망과 좌절도 이 사람을 괴롭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이기 때문에, 그의 뿌리가 생명수에 접촉되어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의 인생은 망하지 않습니다. / 오늘 우리는 시 1편 말씀을 통하여 행복에 대한 정의, 행복한 사람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았습니다. 누가 행복한사람입니까?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아니 그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시간을 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 인생을, 내 은사를 다 쓰도록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 때에 하늘의 기쁨이 여러분에게 찾아 옵니다. 땅을 위해 살면 땅의 기쁨을 갖고, 하늘을 위해 살면 하늘의 기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산책 (시 1편)

시 1:1-6절

시편은 성경 66권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초보 독자들도 가장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성경의 중심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시편을 일부러 가운데 편집되도록 영감을 주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믿음의 중심에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도가 굳건히 자리해야 합니다. 또 시편은 가장 두꺼운 책이기도 합니다. 편수만 해도 150편으로, 66권 중에서 분량도 제일 많습니다. 이 역시 그 의미를 생각해보면 아마 성경 메시지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도임을 말해주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따라서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삶의 가장 많은 부분에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도가 가득해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느 책이든 서론만 제대로 읽어도 책 내용의 80%를 이해하는 것처럼 시편 1편도 전체적인 시편의 내용을 그려줍니다. 시편의 첫 시작이 '복 있는 사람은...'이고 보면 시편 전체는 두말할 것 없이 복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편은 장마다 구절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복 있는 삶인지, 복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에게 어떤 복을 주시는 분이신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50편 마지막 장 마지막 절도 복 주신 하나님을 인하여 "할렐루야"로 끝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그의 백성들에게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복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시편의 전체 주제를 '복 있는 사람'으로 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복을, 어떻게 주시는지를 묵상해보려고 합니다. 본문 3절의 세 단어를 중심으로 시편 1편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나무'이고, 둘째는 '심었다'는 것이며, 셋째는 '시냇가'입니다.

첫 번째, 우리는 하나님이 복 주실 만한 나무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나무의 가장 큰 특징은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문에 나오는 겨와 견줄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입니다. 본문은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겨는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면 쉽게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겨 같은 사람은 결코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 주실만한 사람, 정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면 나무처럼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나무야말로 누군가 자신을 심어준 자리에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한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가지와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그늘을 만듭니다. 우리도 복을 받고, 쓰임 받고자 한다면 바람에 날리는 겨가 아니라 모진 풍파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

나무는 뿌리를 내림으로 아래로 자랍니다. 그래서 강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견딥니다. 또 나무는 가지를 위로 뻗음으로 자랍니다. 높이 하늘을 향해 팔을 뻗음으로 큰 그늘이 되어줍니다. 또 나무는 안으로도 자랍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나이테가 늘어가며 성장할 뿐만 아니라 성숙해져갑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자리 사명의 자리를 든든히 지키는 나무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아래로 자라 말씀과 인격, 기도와 신앙이 깊어지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 자라게 하십니다. 비전과 기도, 영향력이 커지고 믿음이 커지게 하십니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그 그늘 아래에서 쉼을 얻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를 안으로도 자라게 하십니다. 인격을 성숙시켜 주시고 내공이 강해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며 선택한 하나님의 교회, 믿음의 자리를 한결 같이 지키는 나무가 되어 복을 누리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그 나무는 심기워진 나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원래 시냇가에서 저절로 자생한 나무가 아닙니다. 누군가 다른 곳에 있었던 나무를 시냇가로 옮겨 심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시냇가에 있던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 있던 나무였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놔두면 죽을 수밖에 없고 결코 자신의 힘으로는 성장할 수 없는 우리를 생명수 흐르는 시냇가로 주님이 옮겨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 잎사귀를 마르게 하지 않고, 철을 따라 열매 맺는 나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옮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래 메마른 땅 출신입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연명하다가 그곳에서 죽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힘없이 죽어가는 나무였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나무였습니다. 꽃과 열매는커녕 살아 숨쉬기조차 버거운 인생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인생을 시냇가로 옮겨주셨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를 저 깊은 죄악의 수렁에서 두레박으로 끌어올려주셨다는 의미인 동시에, 저 깊은 사망의 감옥에서 해방시켜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심장을 우리에게 이식시켜 자신은 사망으로 옮겨가시고, 대신 우리를 생명으로 옮겨놓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요한복음 5:24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시냇가로 옮겨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앙상하고 볼품없이 서있으나 생명은 전혀 흐르지 않는 나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주님이 복 주시는 사람이 되려면 내게 임한 그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며 믿고 찬양해야 합니다. 나무의 특성상 혼자의 힘으론 결코 1미터도 갈 수 없는 내가 시냇가로 옮겨진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영광 버리시고 말구유에 오시어 잃은 양 찾아 구하시려 / 모진 고통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사 생명까지 내놓으신 주 예수 / 구속하신 그 사랑 끝이 없네 크신 사랑 세상 끝날까지 / 나 영원히 그 사랑 노래하리 저 하늘 높이 사무치도록" 이와 같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에 관한 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옮겨 구원하셨음을 날마다 찬양해야 합니다.

세 번째, 복된 나무가 있는 곳이 시냇가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무가 심긴 시냇가는 말씀이 흐르는 시냇가입니다. 생명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물줄기를 타고 흐르는 시냇가입니다. 그 곳은 주야로 말씀이 선포되는 기적의 물가이고, 말씀 의지했더니 까마귀가 아침저녁으로 고기를 물어다주는 기적을 경험했던 그릿시냇가입니다. 밤이 지나도록 물고기 한 마리 못 잡았어도 말씀에 의지했더니 두 배가 잠길 정도로 많이 잡게 하시는 기적의 갈릴리 물가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오늘날 내가 너희를 어떻게 구원하는지 보고 내가 너희의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하시는 말씀을 듣고 지팡이를 내리쳤을 때 바다 속에 감추어두신 길을 보여주시는 기적의 홍해 물가입니다. 온몸에 문둥병으로 고생했지만 종을 통해 전한 엘리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일곱 번 몸을 담그고 나음을 경험했던 나아만의 기적의 요단 물가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축복은 여러 번 말씀의 시냇가에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의 기적을 경험할 것입니다. 돈 버는 것과 높아지는 것, 노는 것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시편을 지은 이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한나라의 왕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지는 왕만큼 바쁜 사람은 없습니다. 또 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외교, 교육, 농업, 수산업, 문화, 예술, 종교, 복지를 모두 신경 써야합니다. 왕은 즐길 것도 너무 많은 사람입니다. 절대 권력의 왕정체제 아래서는 자기가 원하면 눈치 볼 것도 없이 다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의 자리에 있는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복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할 수만 있다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만을 나의 즐거움으로 삼고 싶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율법을 밤이고 낮이고 묵상하고 싶다".

다윗이 그렇게 고백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콩나물 기르는 정성을 가지고서는 산삼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품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형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입니다. 그것만이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요동하는 삶이 아니라, 심지를 견고히 하여 주의 말씀대로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신실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인생은 두 갈래 길로 나뉘어 집니다. 사는 길과 죽는 길, 잘되는 길과 망하는 길, 형통한 길과 곤고한 길, 행복한 길과 불행한 길, 신앙의 길과 불신의 길이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행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행복으로 갑니다. 어떤 사람은 저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축복으로 갑니다. 어떤 사람은 죽는 길로 가고 어떤 사람은 사는 길로 갑니다. 결국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 향방이 나누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의 갈 길 다가도록 형통의 삶을 꿈꾼다면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 말씀을 따라 가야 합니다. 돈의 시내가 마르고, 사랑의 시내가 마르고, 자녀의 시내가 마르고, 진학의 시내가 마르고, 영혼의 시내가 마를지라도 우리의 삶 가운데 말씀의 시내만 흐른다면 그 모든 것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복 있는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