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즐겁게 해 주던 꽃의 화려함은 사라졌지만 녹색의 향연은 생명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새로운 달 5월의 첫날을 시 한편으로 문을 열겠습니다. "다시 봄이 오고/ 이렇게 숲이 눈부신 것은/ 파릇파릇 새잎이 눈뜨기 때문이지 / (중략) 다시 오월이 찾아오고 / 이렇게 세상이 사랑스러운 것은 / 올챙이 같은 송사리 같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지 / 송아지 같은 강아지 같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지." (이렇게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오규원)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였지만 우리들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오늘 본문과 평행본문을 이루는 막 9:33-37에 의하면 제자들은 가버나움으로 오는 길에서 "누가크냐?"의 문제로 열띤 토론을 하였습니다. 그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길에서 토론 한 것이 무엇이냐?" 물으셨으나 제자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동안 인간으로서의 '존재함'을 끊임없이 강조하셨건만, 여전히 '소유'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자기들의 추함을 드러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말의 양심도 자기들의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라고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합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은 나이와 상관없이 어린아이입니다. 반면에 그 모습을 보고 주판알을 굴리며 향유 값을 계산해낸 유다는 어른입니다. 가롯유다가 지옥엘 갔다면 예수님을 배반해서가 아니라 아이가 되지 못한 어른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린아이 같지 않는 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들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들어가지 못하리라'도 아닙니다.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입니다. 그 어떤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린아이의 가치관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가치관의 문제이자 숙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