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습니다. 바라던 일이 성취되었다하더라도 대통령탄핵은 비통한 일입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자기 밖으로 나가는 능력, 즉 자기초월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특색은 결코 자기 좋을 대로 처신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결코 '자기이익'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따뜻함이 그리운 계절입니다. 빌레몬서는 사도바울이 도망노예 오네시모를 변호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입히고 처벌이 두려워서 달아난 노예입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옥에 갇힌 바울을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옥에서 제한 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바울이었기에 오네시모는 그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적임자였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의 허락을 받는게 순서였습니다. 빌레몬이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라 하더다로 당시의 풍습과 통념상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간 노예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그래서 오네시모를 변호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 하면 엄격, 냉정, 이러한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빌레몬서는 그런 이미지 때문에 감히 접근하기 힘든 사람 바울이 아니라, 따뜻하고 자애로운 사람 바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혼란한 정국, 인간의 비애를 느끼는 대강절에 그리고 오늘 교회창립기념 주일을 맞이한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이 '따뜻함' 입니다. 울법이 냉령함이라면 복음은 따뜻함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7년전, 이곳 만천리에 교회를 세워야 되겠다고 결심한 분들은 분명 따뜻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차가운 역사가 따뜻함의 역사로 대 전환을 이룬 사건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요즘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힘들고 각박한 것입니까? 왜 이처럼 삭막하다 못해 살벌한 것입니까? 그것은 따뜻한 시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통령탄핵정국을 보면서 저는 '따뜻한 정의'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따뜻함과 정의가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그 정신만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