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의 향연을 뽐내는 자연은 아름다움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여전히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존재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에게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면 우리는 ‘사람이 뭐 저러냐?’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마지막 가치기준을 사람에 두고 있으니 다행이지만, 사람에 대한 실망의 도가 지나쳐 ‘이. 인간아!’라는 생각까지 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사람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름답습니다. 모든 면에서 꼭 맞아야지 틈이 생기면 곤란합니다. 욕망으로 인하여 사람(人)에게 틈(間)이 생긴 상태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저항가수 안치환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노래했지만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신앙은 아름다운 삶,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만이 미움과 복수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로마군인들과 그들의 배후에 있는 세상권력, 그 권력을 이용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이 무자비하게 난도질 하는 아픔을 앓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꼭 안는 생명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여정은 이처럼 진실을 알고, 아픔을 앓고, 원수를 안은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오늘본문은 예루살렘교회가 이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확장시키는 교회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절)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것은 인생을 사는 목적이 같고, 방향이 같고, 삶의 방법이 같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생명 가지고 한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이란 어떤 길입니까?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33절) 예수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걷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은혜를 기억하고 고백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사는 길입니다. 예루살렘교회신자들은 부활신앙의 구체적인 고백으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소유를 필요에 따라 나눴습니다. 그들은 앎을 실천했고,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함께 앓았으며, 이방인까지 형제로 껴안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