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적으로 볼 때 조개껍대기를 화폐로 사용했다고 하지만 사실 조개껍데기의 처음 용도는 땅을 파고, 곡식종자를 심고, 잡초도 제거할 수 있는 농기구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농사짓는 기구가 좋아도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씨앗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즉 그리스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숭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헬라인들이 예수님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헬라의 유력자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오히려 저들이 주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런 유력자들에게 지혜의 스승이 될 수 있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할 수 잇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3,24절)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영광은 개인적인 영화가 아니라 메시야로 이땅에 오셔서 이루고자 하신 구원역사의 완성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으로만 완성될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지혜를 찾는 사람들에게 지혜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십자가 죽음이 새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만이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 만이 세상에 생명을 줄 수 잇는 살아있는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예수 생명을 내안에 갖고 잇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헌신 봉사 사역 충성 한다고 그 안에 예수생명이 있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로부터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것'에 있믕르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는 세상에 예수생명을 주는 사람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것에 집착하면 그것 이상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을 내려놓아야 더 많은 것이 보입니다. 더 소중한 것을 얻게 됩니다. 더 넓고 깊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