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을 맞이했어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하여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명절은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입니다. 하지만 그들만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위로와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B.C 586년, 유다 왕국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그 찬란했던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유다 민족의 자부심, 신앙의 중심이었던 성전은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지도자들과 젊은 유력자들은 낯선 땅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갔습니다. 70년 동안 계속 된 포로생활은 그 어떤 것에서도 가능성을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의 시대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내 백성이 죄 값으로 받아야 할 형벌과 심판이 끝났다. 그러므로 새로운 소망을 가슴에 품어라. 너희는 가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 소망이라는 마르이 히브리어 '베타흐'는 '믿는다. 의지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소망이 없다는 것은 믿고 의지할 데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믿고 의지할 데가 없었던 당신의 백성들에게 소망을 부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본래 범죄한 인간은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소망없이 살던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오늘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당신의 백성들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위로해야 하는 것입니까?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26a) 위로는 마음에 닿도록 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에 닿도록' 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레브'는 '심장'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심장이 반응하도록 위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장은 어느 때 반응합니까? 함께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방법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큰 위로의 사건은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그분이 오심으로 죄악에 눌린 사람들, 질병으로 고통받던 사람들, 사회적으로 억눌린 사람들에게 진리와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위로를 받은 자만이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