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종교개혁 499주년 기념주일입니다. 14세기 이후 중앙권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독일에서 교황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교회의 비리는 점점 극에 달했습니다. 이 와중에 교황레오 10세는 베드로대성당을 증축하면서 건축비가 부족하자 면죄부판매를 용인하게 되었고, 이는 루터의 신앙양심에 불을 댕겼습니다. 그는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에 순응할 수 없었고, 침묵할 수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대학성당 정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내걸고 기존교회와 본격적인 논쟁에 들어갔으니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시작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용기란 무엇입니까?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이슬람근본주의국가에 선교사, 아니 단기선교라도 나가는 것입니까? 사찰에 들어가 불상을 훼손하고 대웅전 앞에서 기도와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용기란 사람들이 어떤 조류에 모두 휩쓸리더라도 바르게 깨어 있으려는 ‘의지’와 ‘몸부림’입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로 살았습니다. 루터가 내세운 종교개혁의 모토(motto, 신조, 信條)는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오직성경입니다(sola scriptura)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의식과 눈에 보이는 형상(icon)을 중요시 여길 수밖에 없고, 감정이나 체험에 치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신조는 오직믿음(sola fide)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인간은 구원을 얻습니다. 신앙인들 중에는 신념과 신앙을 자주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념과 신앙은 출생지가 정반대입니다. 신념의 출생지는 인간의 생각이며, 신앙의 출생지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종교개혁의 세 번째 신조는 오직은혜(sola gratia)입니다. 하나님은 문제 많은 우리를 은혜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사랑해 주십니다. 그런 은혜 앞에 우리들은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그것에 대하여 우리 주님은 오늘본문에서 자기부인과 주를 위한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자기부인이 아니라 자기인정을 위해, 예수를 위한 신앙이 아니라 나를 위한 신앙으로 자꾸 흘러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부인과 예수를 위한 삶을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