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면 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과 타협을 안했기 때문에 비명도 지르고 울기도 하는 것이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면 굳이 울거나 비명을 지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걷는 이땅에서의 여정이 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무지하게 아픕니다. 비명이 저절로 잇새에서 새어나올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기는 것입니다. 그게 살아있음의 증거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파도처럼 끝없이 몸을 뒤집는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파도가 없듯 우리도 꿈틀대는 야성의 호흡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은 18년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여인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고쳐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2절) 짧은 구절안에 온갖 핸디캡, 비관적인 상황이 다 열거되어 있습니다. 사회적 평가기준으로 볼 때, 이 여인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바라본 이 여인의 가치는 '생명' 그 자체로서의 인격체였고, 동등한 하나님백성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아픔을 깊이 들여다보시며 그 아픔을 고쳐주셨습니다. 사람ㄷ릉느 귀신들려꼬부라지는 병에 걸렸다고 손가락질 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존재가치를 가득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에 대하여 분을 내며 유대인들을 선동하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이런 반문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도 너희가 짐승을 먹이려고 묶인 것들을 풀어내면서, 18년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였던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풀어주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어쩌면 이 여인이 진정 원했던 것은 병을 고침받는 것이 아니라, 18년동안이나 인생의 바닥에서 해매고 있는 나를 한 인격체로 바라봐 주는 부드러운 시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사회는 병든 세상입니다. 존재의 가치를 소유로 따지고 바라보는 '천박'이라는 눈병, 가진것이 없는 이에게 하품밖에 건넬 것이 없는 '무정'이라는 심장병, 눈과 심장이병든 영혼이라면 그것은 메르스보다 더 위험한 질병이 아닐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