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나서 자란 곳, 사람, 부모의 영향으로 자신과 외모나 성격을 닮은 사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적인 이유를 제외하고 누군가가 '나를 본받아라.'고 하면 교만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이유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1:1) 어느 누가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본받을 수 있습니까?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고 하셨습니다. '거룩'은 예수님을 본받는 삶이고 결코 이룰 수 없는 삶은 아닙니다. 주님은 이룰 수 없는 좌절감을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신분이 죄인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죄인이었던 것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로잡혀 살면, 죄를 행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며, 죄에 끌리기보다는 하나님께 이끌려 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18,19절의 말씀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이 없으므로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으며 자신이 배부르고 따뜻한 삶을 추구하고 삽니다. 부자인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것보다 물질을 위하여 사는 것이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영광의 형체를 가지게 되는 그날까지 때론 어렵고 힘들더라도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본받는 사람으로 꼭 가져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입니다. 18절에서 바울은 그들의 행동을 보며 눈물 흘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바울이 눈여겨 보라고한 사람들은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은 아직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이들을 향해 눈물을 흘립니다. 나의 구원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아닌 심판 아래 있는 이들을 위해서 눈물 흘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 천국 시민입니다.